대학원 공부노트
1940년대 중동 이야기 본문
#1 1948년 5월 16일 제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거주하던 땅에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건국되자마자 아랍 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며 그렇게 4차례나 일어난 오랜 중동의 전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도입한 Avia S199 25대와 영국의 Supermarine Spitfire 60대가 전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이스라엘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들여온 Avia S199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을 잔혹하게 핍박했던 나치 독일에 납품될 예정이었던 Messerschmitt Bf109의 면허생산형이다. 이밖에도 총과 탱크를 포함한 다양한 나치 독일의 무기들이 소련의 지원 아래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가 유대인들을 지켜주었다.) 게다가 인구수로 보아도 건국일 기준, 65만 명의 이스라엘은 1억 4,000만 명에 달하는 5개국 아랍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이스라엘에는 아직 정규군도 창군되지 않았던 반면 아랍 연합국에는 영국식 훈련을 받은 아랍 정규군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난 1949년 6월 10일, 유대인 지구를 지켜냄은 물론이고 되려 팔레스타인 땅의 70% 이상을 획득해낸다.
얼핏 보면 제1차 중동전쟁은 레반트 지역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갑자기 바다 건너 온 유대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황당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중동의 갈등은 제국주의 시절 자신들의 이익만을 고려했던 무책임한 영국이 숨어있다.
#2 영국이 심어둔 갈등의 씨앗 : 1915년 후세인-맥마흔 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5년 영국과 아랍 사이에서 여러 편의 편지가 오갔다. 이때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McMahon)과 메카의 샤리프 무함마드의 자손인 후세인이었다. 당시 해군이 주력이었던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이었는데 사막과 광야의 지형이 익숙하지 않아 좀처럼 전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후세인은 맥마흔에게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에 있는 영국에 협력할 테니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그 땅에 아랍인들의 국가 건설을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아 서신을 보냈다. 이익이 서로 맞아떨어졌던 이들은 그렇게 1915년 7월부터 내년 3월까지 10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 아랍 민족의 국가 건국을 지지한다는 약속(후세인-맥마흔 선언)을 받아냈다.
그런데 1900년대 초반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식민지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1915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비밀 협상을 가지며 마침내 제정 러시아의 동의 하에 1916년 5월 1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비밀 협정 하나를 맺는다. 그렇게 프랑스가 레반트(levant)라고 부르는 지금의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 지역을, 영국이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고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을, 마지막으로 러시아가 흑해 남동 지역을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터키 분할 밀약이라고도 불리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한다. 그리고 시간대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 영국은 후세인과도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1917년 말 제정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정권이 11월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으면서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그 다음 이들은 돌연 독일과 브레스트-리토 프스크 조약을 맺으며 종전 선언을 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한다. 이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볼셰비키 정권은 정부 기록관도 습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 폭로되고 만다. 여기에 전쟁 중반에 삼국 동맹을 탈퇴한 이탈리아도 승전국으로서 자기 몫을 달라는 요구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은 경악했으며 터키는 기뻐했다.”
#3 피를 부르는 자원 석유 : 1928년 적선협정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20세기 전쟁에서 석유란 없어서는 안될 보급품이었다. 그러다보니 대미 석유 의존도가 80%에 달했던 일본은 미국이 석유 수출을 금지하자 진주만 공습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 내고자 했고 1945년 5월에 열린 심문에서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슈페어도 석유를 얻으려는 욕구가 소련을 침공하게 된 주된 동기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중동에서 발견된 석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들의 군대와 공장이 모두 석유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이런 사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물론 이들에게 중동이 중요했던 이유는 인도차이나 반도(프랑스)와 인도(영국)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함도 있었겠으나 식민지를 관리하는 것 역시 석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1920년 4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이탈리아 휴양도시 산레모(San Remo)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모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승전국들은 동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그들이 오스만 튀크르와 맺은 강화조약을 바탕으로 중동 지역을 어떻게 나눠 가질지를 논의했다. 이때 석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교묘하게 미국을 산레모 회의에서 배제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최초의 유전이 1859년 펜실베니아에서 발견된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국은 어엿한 산유국이었으며 1920년대까지 석유 생산량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가 사용한 석유의 90%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굳이 미국과 중동의 석유를 나눠가질 필요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자료
Source of cover image
"Map of the Partition of Israel and Palestine ," in World History Commons, https://worldhistorycommons.org/map-partition-israel-and-palestine [accessed July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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