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공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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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걔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신기하게 우리나라처럼 분단된 두 나라(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수도(서울과 평양)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을 서독과 동독으로 그리고 동독 안에 위치한 베를린을 다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서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반드시 동독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래서 동독은 북부에는 함부르그-서베를린 항로를, 중부에는 하노버-서베를린 항로를 그리고 남부에는 프랑크푸르트-서베를린 항로를 할당해주었고 이들의 비행 폭과 고도는 20 마일, 10,000 피트로 제한되었다.
1952년 여름,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Lauris Norstad는 당시 미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Vandenberg에게 서베를린 정기항공편으로 동독을 정찰할 수 있는 특수 정찰기의 개발을 요청하고 이를 수락한 Vandenberg는 곧바로 개발진을 소집한다. 이때 그는 단순히 한 대의 정찰기를 제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에도 신속하고 비밀리에 특수임무용 기체를 획득할 수 있는 절차를 새로 수립하기로 했고 그 결과 탄생한 프로젝트가 바로 Big Safari였다.
한편, 미 공군은 1947년부터 2년간 보스턴 대학교에서 K-42 정찰 카메라를 개발 중이었고 1951년에는 이들을 B-36 폭격기에 장착하여 시험하는 중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카메라는 45,000 피트에서 골프공을 식별 가능한 수준의 해상도를 지녔다고 한다. 그리고 K-42 카메라는 수송기에 탑재될 예정이었다. 우선, 새로운 항공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항공기를 개조한다는 BIG SAFARI의 기본 원칙에 따른 결정이었으며 정찰기임이 구분되지 않도록 외부에 따로 정찰 포드를 설치할 필요가 없는 수송기나 폭격기가 고려되었다. 그러나 폭격기는 의심을 사기 쉬우며 최악의 경우 동독에 대한 폭격이라는 오해 및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 최종적으로 Boeing YC-97 수송기에 정찰용 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Boeing과 계약을 맺어 개조를 진행하고자 했으나 당시 Boeing이 다른 사업을 진행 중인 바람에 보안이 소홀해지는 문제가 발생하자 사업자는 Convair로 변경되었다.
이후 YC-97은 6주간의 동독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고도를 조금 더 높일수만 있다면 보다 넓은 면적을 정찰할 수 있을거라는 미 공군의 요구에 따라 1953년 2월 23일 급유 붐을 제거한 KC-97 공중급유기가 정찰용 카메라를 탑재한 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카메라 제어 방식에도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3각점 부감 촬영법을 위한 3대의 K-17 카메라와 K-30 카메라가 추가로 탑재되었다. 이들은 K-42 카메라와 연동되어 더 넓은 면적을 정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KC-97은 더 높은 고도에서 동독 대부분의 지역을 정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정찰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항로 뿐만 아니라 서독과 동독 경계에서도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서독 내를 비행하는 것이기에 별도의 고도 제한이 없어 32,000 피트 상공에서 정찰이 이루어졌다. 이후 정찰에 대한 수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여 11대의 기체가 추가로 제작되었으며 1962년에 퇴역할 예정이었으나 같은 해 쿠바 미사일 사태로 정찰에 대한 수요가 다시 증가하는 바람에 현역으로 복귀하게 된다. 결국 사태가 진정된 뒤에서야 U-2 정찰기에게 임무를 맡기고 퇴역한다.
참고자료
The History of Big Safari by Col. Bill Grimes. USAF (Ref).
West Berlin air corridors.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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