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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국 항공사 본문

항공/중국과 대만

1950년대 중국 항공사

lightbulb_4999 2022. 7. 28. 10:00

War Thunder Forums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오늘날 J-20과 FC-31 같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를 선보이며 무시할 수 없는 공군력을 자랑하는 중국은 믿기 어렵겠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수적 우세만 가질 뿐 질적으로는 북한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대만과 일본은 중국보다 보유한 전투기 수는 적었음에도 중국의 항공 전력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고 대내외적으로도 이들이 중국보다 더 강한 공군력을 가졌다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런 중국의 독자적인 전투기 개발 역사는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을 계기로 시작된다.

 

1949년 10월 1일, 장제스와 오랜 내전 끝에 마오쩌둥은 중국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1월부터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했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소련으로부터 MiG-15를 공급 받았고 이때 소련은 중국에게 단순히 기체뿐만 아니라 관련 기술자들까지 제공해주었다. 또, 자국으로 중국인들을 데려와 교육시키고 중국에 퐁동 시설을 지어주는 등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여러 환경들을 조성해주었다. 이처럼 건국 초기에만해도 소련은 같은 공산국가였던 중국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중국에 대한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중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항공기를 면허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 군용 항공산업의 시초인 선양비행기연구소가 세워진다.

 

이후 중국은 소련에서 들여온 MiG-15UTI 훈련기를 단좌형인 J-2와 복좌형인 JJ-2라는 이름으로 면허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훈련기이고 엄밀하게 따지면 전투기라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제작된 첫 제트 전투기는 MiG-17F의 면허생산형인 J-5라고 할 수 있다. J-5는 1956년 7월 6일, 초도비행에 성공하고 1957년부터 인민해방공군에 인도되었으며 J-2와 마찬가지로 단좌형은 J-5, 복좌형은 JJ-5로 불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58년에는 소련의 첫 초음속 전투기였던 MiG-19 [1]의 면허 생산권을 획득하여 J-6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을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폭격기도 들여왔다. 1952년부터 250대 가량의 Ilyushin Il-28 폭격기를 도입하였고 1958년에는 오늘날까지도 중국 공군이 운용하는 Tupolev Tu-16 폭격기 면허생산권을 획득하여 노후한 Il-28을 대체하였다. 심지어 적은 수량이었지만 과거 소련이 미국의 B-29를 무단 복제하여 생산한 Tupolev Tu-4 폭격기도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초창기 중국 인민해방공군은 모두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기체를 면허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중국이 독자적인 개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국은 소련 전투기를 면허생산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흥촨 503’ 계획을 통해 인민해방공군에서 운용할 독자적인 고등 제트 훈련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앞서 보았듯 손쉽게 소련으로부터 최신예 기체를 받아올 수 있었던 중국이 굳이 항공기 독자 개발에 착수한 이유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부터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차이 때문이었다.

 

건국 전부터 스탈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며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에서 소련이 보여준 소극적인 자세와 자신들에게 다른 동맹국들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무기를 공급한 소련에게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 하며 중국의 팽창식 공산주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소련은 중국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의 공산국가라 생각하지 않고 여러 공산진영의 위성국가들 중 하나로 여겼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련은 조금씩 중국에 대한 기술 지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으며 이에 중국은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제트 훈련기 JJ-1은 중국이 가지고 있던 MiG-15UTI를 참고하면서 설계에 들어갔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JJ-1의 외형은 테이퍼익을 채택했다는 점과 공기 흡입구 위치만 제외하면 소련으로부터 받아온 MiG-15와 비슷했지만 이를 그저 따라한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JJ-1의 공기흡입구는 소련 전투기들과 다르게 기수가 아닌 동체 양측에 위치하였으며 날개는 후퇴익 대신 날개 앞전에 약간의 후퇴각을 준 테이퍼익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소련의 Klimov RD-500 엔진을 역설계하여 제작한 PF-1A가 탑재된 점이다. 이 엔진은 소련이 영국의 Rolls-Royce Derwent 엔진을 무단으로 역설계하여 제작한 엔진이었는데 한마디로 영국의 제트 엔진 기술이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Shenyang JJ-1의 개발은 당이 ‘역설계를 통한 단좌 전투기의 국산화’로 목표를 낮추면서 취소되고 말았다. 이때 당에서 목표를 낮추고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을 취소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체의 완성도와 별개로 중국 인민해방공군이 운용하고 있던 기체 대부분이 아직 왕복 엔진 항공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종사 입장에서는 제트 훈련기가 개발된다고 한들 제트 훈련기로 훈련을 받아도 다시 왕복 엔진을 가진 전투기에 타야 하는 웃픈 상황이 연출될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엔진 문제였는데 지상 운전에서 발견된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제트 엔진 블레이드의 균열 때문이었다. 결국 Shenyang JJ-1은 시제기 2대만 제작된 채 개발이 중단되었고 훗날 1958년 7월에 처녀비행을 실시했다는 중국측의 주장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사이, 1950년 한국전쟁과 1956년부터 시작된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등으로 중국과 소련의 사이는 갈수록 냉담해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 10월,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흐루쇼프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과 진행 중이었던 여러 합작사업들을 파기하고 만다. 이러한 ‘중소결렬’ 이후 중국에 파견되었던 모든 소련의 기술자들은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돌아갔다.

 

한편, 1950년대 중국은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단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51년 5월에는 전 세계가 한국전쟁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무력으로 티베트를 통합하였다. 그와 동시에 대만으로 건너가 호시탐탐 본토를 노리는 장제스도 견제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을 뒤흔든 사건은 바로 ‘대약진운동’이었다. 1958년에 마오쩌둥의 주도로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을 따라잡겠다고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농업과 경공업을 퇴보시키며 중국 전체의 문화·경제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키고 말았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기 개발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리가 만무했고 중국의 항공산업은 소련의 지원이 끊긴 채 1960년대를 마주해야만 했다.



[1] 소련은 1955년에 이미 MiG-21 비행을 마치고 1957년에 MiG-19의 양산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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