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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국 항공사 본문

항공/중국과 대만

1960년대 중국 항공사

lightbulb_4999 2022. 7. 2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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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국은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항공산업을 이끌어가야 했다. 게다가 대약진 운동으로 1950년대 말 소련에서 들어온 군용기들은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생산에 들어가 공군에 인도될 수 있었다. 그렇게 1952년에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Il-28 폭격기는 1965년이 되어서야 Harbin H-5라는 이름으로 역설계에 성공해 국내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 처음으로 날아오른 MiG-19의 면허생산형인 J-6은 1964년이 되어서야 인민해방공군에 인도될 수 있었다. 이후 J-6은 1965년에 레이더 수납을 위해 공기 흡입구를 동체 측면으로 옮긴 지상 공격기 Nanchang Q-5로도 개조되었다. (그러나 기술력이 부족해 실제로 레이더를 수납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중국은 소련에서는 얼마 운용되지 못한 MiG-19를 상당히 오랜기간 운용했는데 이는 J-6의 성능이 만족스러웠다기보단 소련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신예기 도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과 멀어지게 된 중국은 국내 유일한 전투기 연구 시설이자 생산 시설인 선양비행기연구소가 소련과 가까운 동북지역에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제2의 방산업체를 내륙인 사천성 지방에 세우기로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연구소가 바로 청두에 세워진 청두항공공업집단(成都飞机工业集团)이다.

 

Chengdu J-7 Fishcan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1959년 중소 결렬 이후 중국과 소련이 곧바로 모든 교류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냉전의 차가움이 극에 달했을 때 소련은 중국의 지원을 얻고자 중국에게 MiG-21의 면허생산권을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나름 최신예 기체였던 MiG-21의 면허생산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62년부터 면허생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1950년대 초반에 비해 소련은 중국에게 일부 부품이나 자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비슷한 시기 소련이 중국과 인도 사이에 벌어진 국경분쟁(1962)에서 인도 편에 서자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다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중국은 소련이 자국 내에 남겨둔 일부 자료들만을 가지고 MiG-21을 생산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소련이 제공해준 MiG-21이 그렇게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기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기체는 MiG-21F-13이었는데 이 기체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 초기 MiG-21과 함께 중국에서 생산된 초창기 J-7을 보면 기체의 앞부분이 작고 조종석 뒤가 얇으며 전체적으로 날렵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엔진도 간단한 구조를 가진 R-11 터보제트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다. 특히 R-11은 MiG-19에 탑재된 R-9 엔진을 개량한 엔진이었는데, 중국은 앞서 MiG-19에 탑재되는 R-9 터보제트 엔진을 WP-6으로 면허생산한 경험이 있어 역설계하는데 조금이나마 수월했을 것이다. 덕분에 역설계를 맡은 선양항공산업집단은 과거 MiG-15부터 MiG-19 등 다양한 소련 항공기들을 면허생산한 경험을 바탕으로 역설계에 성공했고 1964년 3월부터 R-11 터보제트 엔진은 WP-7이라는 이름으로, MiG-21은 J-7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을 시작했다.

 

특히, J-7은 중국이 처음으로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지 않고 나름 독자적으로 설계한 기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MiG-21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몇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였다. 원래 MiG-21은 한정된 동체 내부에 커다란 R-11 엔진을 넣으려다 보니 연료 탱크가 기체의 무게 중심 앞 켠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게 중심 앞켠에 위치한 연료탱크 때문에 비행 중에 연료가 일정량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기체의 안정성이 크게 저하되는 치명적인 설계상의 결함을 가졌다. 그래서 J-7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였고 1980년대에는 F-7A라는 이름으로 이집트를 포함한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같은 여러 아시아 공산국가들에게 수출까지 성공하였다. 이처럼 중국은 J-7을 개발하면서 많은 기술력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이는 훗날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MiG-21은 중국이 역설계에 도전해볼 만할 정도로 기체의 구조가 단순했기 때문에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게다가 1970년대까지 끊임없이 MiG-21을 개량할 수 있었던 소련과 달리 중국은 1966년에 시작된 문화 대혁명으로 J-7을 제때 개량하지 못한 채 항공산업의 암흑기를 걷게 된다.

 

J-7의 역설계가 끝나고 양산에 들어갈 무렵, 1966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자체는 1969년에 종결되었다지만 그 여파는 마오쩌둥이 죽는 1976년까지 지속되어 중국의 항공산업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1966년 첫 비행에 성공한 J-7은 1967년 여름부터 양산에 들어갔지만 인민해방군은 1970년이 다 되어서야 인민해방공군에 인도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항공기들의 교체 및 개발사업이 문화 대혁명으로 지체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문에 제때 항공전력을 교체하지 못하고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굉장히 퇴보하고 말았다.

 

Shenyang J-8I Finback-A

특히,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J-7에 이어 개발에 들어갔던 신형 요격기 개발 사업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중국은 대만에서 건너오는 미국의 고고도 정찰기 U-2와 함께 미국의 초음속 폭격기 B-58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보다 핵탑재가 가능한 폭격기가 더 위험한 전력이라 판단한 중국은 자국 영공과 영해를 지키기 위해 초음속 전천후 요격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물론, 소련으로부터 일부 제공받은 MiG-21 설계 자료를 바탕으로 J-7 초음속 요격기가 있었으나 여전히 엔진과 항전 장비를 비롯한 핵심 부품을 제작할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이제는 독자적으로 미국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독자적인 요격기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방의 최첨단 기체들에 맞서려면 J-7보다 더 우수한 요격기가 필요했다. 이에 선양항공산업집단(SAC)와 청두항공산업집단(CAC)에서 각각 인민해방군이 제시한 요구 조건에 맞춘 설계를 내놓았다.

 

우선, 선양항공산업집단, 줄여서 SAC에서는 기존 J-7을 쌍발 대형화한 J-8을 제시했다. 이는 중국이 소련이나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목표로 상정한 MiG-23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능이었지만 기술력이 부족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개발이 진행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J-8의 설계는 J-7에 탑재된 소련제 R-11 엔진을 역설계하여 탄생한 WP-7A 엔진 2개가 탑재될 예정이었고 전체적인 형상은 J-7을 기다랗게 늘린 또는 대형화한 형상에 가까웠다. 이처럼 J-8은 기존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에 들어간 덕에 비교적 이른 1969년 7월 5일, 첫 비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1960년대 시작된 문화 대혁명으로 양산형은 1980년에 와서야 등장하게 된다.

 

한편, 청두항공집단, 영어로는 CAC(Chengdu Aircraft Coorperation)에서는 높은 추력을 낼 수 있는 신형 엔진 WS-6 터보팬 엔진을 탑재하고 삼각익에 카나드가 달린 다소 진보적인 J-9 설계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등장한 J-9는 설계상으로 중국이 원했던 MiG-23과 대등한 성능을 가진 전투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중국이 지금껏 다뤄보지 못한 새로운 기술들을 너무 많이 접목시킨 점과 공군 수뇌부의 요구사항이 빈번히 바뀌는 바람에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일례로 공군 수뇌부는 해당 기체가 고고도 요격 임무와 장거리 방공 임무를 겸할 수 있게끔 설계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설계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했고 설계가 완성된 이후에는 갑자기 개발자들을 선양에서 청두로 이전시키는 바람에 개발이 다시 중단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기체가 순조로게 완성되나 싶었지만 중국이 야심 차게 개발 중이던 WS-6 터보팬 엔진 개발이 실패로 끝나면서 J-9는 단 한 대의 시제기만을 남긴 채 1960년대 말에 시작된 J-9 개발은 공식적으로 1980년에 전면 중단되었다. 그러나 훗날 J-9를 개발하면서 축적한 기술들은 1990년대 청두항공집단이 J-10을 개발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참고로, WS-9 터보팬 엔진 개발은 베트남전에서 추락한 F-4 Phantom II 전투기의 J79 엔진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국은 베트남전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었던 미국의 발목을 잡아두고자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북베트남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중국은 북베트남으로부터 격추된 General Electric J79 엔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당시 J79 엔진은 1950년대에 개발되어 오늘날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F-4 Phantom II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높은 추력을 가진 고성능 터보제트 엔진이었다. 당연히 신형 전투기 개발을 위해 기존 R-11 엔진보다 더 강력하고 발전된 엔진이 필요했던 중국은 곧바로 J79 엔진의 역설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GE J79 엔진은 소련의 Tumansky R-11 엔진과는 달랐다. 1960년대 중반에 중국으로 들어왔으나 1970년까지 2대의 시제 엔진이 제작되었고 1970년대 말까지 고작 8대의 WS-6 엔진이 제작된 게 끝이었다. 1980년대에 WS-6 엔진의 개발이 완료되었다고 하나 지상에서 12시간 연속 운전에 성공했던 것이라 완벽한 성공이라 보긴 어렵다. 결정적으로 WS-6 엔진을 탑재하기로 예정된 기체들의 개발이 중단된 점과 이후에도 이를 탑재한 기종이 없다는 점에서 WS-6 엔진의 개발은 실패로 끝났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나 J79 엔진을 통해 얻은 경험은 이후 중국이 서방으로부터 다양한 엔진을 들여오고 또 기술지원을 받으면서 중국이 독자적인 제트 엔진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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