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공부노트
1970년대 중국 항공사 본문
1972년 2월 21일, 중소 국경 문제(1969)로 소련과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던 중국 베이징 공항에 미국 국적기 한 대가 착륙했다. 비행기는 미 공군 소속의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이었으며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었고 그를 맞이하는 사람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였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은 중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시점에 이뤄졌다.
당시 미국은 극동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었다. 휴전선과 타이완 해협 사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력 충돌이 반복되었고, 프랑스가 완벽하게 쫓겨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전복을 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미국이 있었다. 이때 공화당 출신의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 종결을 선고 공약으로 내세우며 1969년에 미국의 제 37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는 곧바로 자신이 선거 공약으로 내건 ‘베트남전 종결’을 위해 ‘전체적인 세계질서 개편’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했다. 그는 당시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세력의 구상에 따라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세계 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1969년 1월 20일, 자신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미·중 수교를 언급하며 동년 7월부터 미국인의 중국 관광을 허용하고 12월에는 중국과의 대중 무역을 일부 허용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빠르게 개선해나갔다. 하지만, 반대로 대만과의 관계는 급격하게 경색되었으며 언제나 미국의 최신형 무기를 별 어려움 없이 도입할 수 있었던 대만 공군의 F-4 Phantom II 도입은 좌절되었다. 이처럼 대만과 미국의 관계가 멀어지자 자연스레 대만과의 수교를 단절하는 나라가 늘어났고 1970년이 되자 대만과 수교한 나라는 63개국, 중국과 수교를 맺은 나라는 62개국으로 대등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71년, 대만은 UN상임이사국 지위에서 축출되었고 더 나아가 UN에서 자진 퇴장하고 말았다.
한편, 중국은 한때 사회주의 아래 혈맹을 맺은 소련이 이념갈등(1959)과 중·인 국경분쟁(1962)에서 인도를 지원한 점 그리고 우수리 강에서 벌어진 국경분쟁(1969)으로 더 이상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동쪽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대만이, 서쪽에서는 티베트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쪽에서는 미국이 베트남과 싸우는 중이었다. 게다가 나라 안으로는 1960년대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이러한 위협을 잠재울 수 있는 커다란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때 1971년 4월 훗날 ‘핑퐁외교’라 불리는 미·중 양국 탁구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렸고 7월에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는 7월 15일, 미-중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미국 대통령이 내년 5월이 오기 전에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앞서 살펴본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1979년에 미국을 방문한 뒤 돌아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을 꺼내들며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며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는다.
그러나 서방과 교류하며 중국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중국이 소련에서 들여온 2세대 전투기를 주력 전투기로 사용하고 있을 때 바다 앞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은 3세대 전투기들을 배치하여 운용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은 1970년대 초부터 4세대 전투기 F-15를 개발해 운용하는 등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 있었다. 베트남전에서 2세대 전투기를 가지고도 괜찮은 격추율을 보여주었던 북베트남을 보며 자신들의 전력을 낙관하고 있던 중국 입장에서 주변국들의 발전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결국,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잠잠해지는 1970년대 중반부터 부지런히 서방제 기술을 들여와 자국 공군을 현대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항공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엔진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은 1960년대에 북베트남으로부터 몰래 베트남전에서 피격당한 F-4 Phantom II 잔해를 들여와 J79 터보제트 엔진을 역설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한 구조를 지녔던 소련제 엔진과 달리 복잡하고 고도의 기술이 녹아 있었던 J79 엔진을 역설계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역설계하여 제작한 WS-6 터보팬 엔진은 실망스러운 성능을 보여주며 중국의 독자적인 터보팬 엔진 개발은 실패로 끝났었다.
이에 1974년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1960년대에 개발된 구형 엔진인 Rolls-Royce Spey RB.168 엔진의 면허 생산권을 구매한다. 당시 영국은 과거 소련에게 Nene 엔진을 제공해주고 곤혹을 치른 경험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무단 복제를 염두에 두고 중국에게 구형 엔진을 제공해주었다. 참고로,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Spey 엔진에 앞서 1972년부터 6년 간 기체 당 3대의 Spey 엔진을 탑재하는 Trident 여객기를 구매하였고 이는 중국 항공사의 첫 서방 여객기였다. 그러나 1960년대 기술로 개발된 구형 엔진이다 보니 1970년대에 등장한 엔진들과 비교하면 구조도 복잡하고 추력 대 중량비도 낮았다. 무엇보다 Spey 엔진은 저고도에서의 성능은 우수했지만 고고도에서는 성능이 떨어져 미국 폭격기를 요격하는 고고도 요격기 개발이 주된 목표였던 중국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엔진이었다. 그래서 WS-9를 탑재한 군용기는 중국에서도 지상 공격용 전폭기인 JH-7이 유일하다. 그래도 성능만큼은 영국의 F-4K/M에도 장착된 적이 있을 정도로 준수하였으며 터보팬 엔진을 간절하게 원했던 중국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중국은 1976년부터 영국제 Spey 엔진에 대한 기술 이전을 받아 WS-9라는 제식명으로 생산하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로우패스 터보팬 엔진을 보유하게 된다.
이후에도 중국은 소련과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주변국들과 대등한 전력을 갖추기 위해 서방 국가들의 3세대 전투기 도입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에서 중국에게 Mirage 2000을 생산라인 이전을 포함하여 패키 판매를 제안했고 미국은 중국에게 F-16의 다운그레이드 형이라 할 수 있는 F-16/79를 판매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국은 자본과 규모로 밀어붙이는 지금의 중국과 달랐다. 또, 지금까지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소련제 전투기를 대량으로 운용해왔으며 소련제 무기를 사용하던 중국 입장에서는 전투기만 서방 국가들에서 도입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무기체계부터 많은 것을 바꿔야 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안한 프랑스 그리고 긍정적인 검토까지 이뤄졌던 미국과의 거래는 끝내 성사될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은 신형 전투기 도입 대신 기존에 운용 중이던 전투기들의 항전장비를 개량하는 방향으로 공군 현대화를 모색했다.
당시 J-7은 소련이 철수한 1960년대에 개발이 시작되어 1966년 1월 17일에 초도비행을 마쳤지만 문화 대혁명으로 1970년대 말에 와서야 본격적인 양산이 시작될 수 있었다. 즉, 중국은 1970년대에 와서야 독자적으로 2세대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능은 매우 실망적이었다. 우선, J-7I(수출형은 F-7A)의 공기 흡입구의 노즈콘은 가변 노즈콘으로 바뀌었고 100 리터의 연료 탑재 공간을 희생하여 기총을 탑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말, 탐지거리가 3 km에 불과한 CL-1 레이더를 가진 J-7 초기형이 비하면 나아졌으나 여전히 탐지거리가 5 km에 불과한 CL-2 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추력을 더 강화하고 수명은 늘린 WP-7II 엔진을 탑재한 J-7II(수출형은 F-7B)이 등장하였으나 배기열 온도 증가에 따른 발열 문제로 한참 고생하였다. 결국,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영국과 협력하여 J-7 개량사업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탄생한 기체가 바로 J-7M이다. J-7M은 J-7 개량형 중 가장 많은 양이 생산되어 수출되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파생형을 낳은 기체이다. 하지만 이 역시 1980년대에 와서야 등장하니 1970년대 J-7은 1960년 말에는 문화 대혁명을 직접적으로 겪고 1970년대에는 기술력 부족으로 개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러모로 불우한 기체였다. 그래도 1980년대에 와서는 다양한 개량을 거쳤으며 더 나아가 그 파생형 중 하나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JF-17가 되기도 한다.
Nanchang J-12
1965년 베트남 전쟁에서 비교적 작고 구형의 MiG-17이 거대한 서방제 초음속 전폭기들을 상대로 뜻밖의 전과를 올리는 것을 본 중국은 소형 전투기가 품고 있는 잠재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설파한 게릴라 전술을 전투기에 대입시켜 나라 곳곳에 소규모 비행장을 여럿 두고 이곳을 돌아가며 비행기를 순환 배치하는 전술을 구상하게 된다. 이는 오늘날처럼 실시간으로 적의 병력을 감시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모든 기지를 동시에 공습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행기 한 대 없이 비어 있는 주기장만 공격하게 만들 수 있었다. 즉, 전투기가 한 비행장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상대방의 공격에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그런 전술을 꿈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비행장은 그 규모가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기체는 작을수록 이동이 편리하므로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하며 크기가 작은 기체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1969년 7월부터 ‘소젠’이라는 계획 아래 기본 설계가 들어갔다. (여기서 ‘소젠’이란 작을소(小)에 전투기(섬멸)를 의미하는 젠(歼)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난창비기공사는 새로운 국산 전투기 개발이라는 큰 기대와 함께 1년 5개월 만에 원형기를 설계해냈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Nanchang J-12는 1970년 12월 26일에 초도비행을 실시하게 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 Nanchang과 함께 Shenyang에서도 동일한 개념의 경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WP-6Z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한 J-12와 달리 Rolls-Royce Spey 터보팬 엔진을 탑재하려고 했던 Shenyang J-11은 엔진 공급의 문제와 빠르게 개발이 진행된 J-12에 밀려 개발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자체적인 시험을 어느 정도 통과한 원형기는 1973년 9월에는 마오쩌둥과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앞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였고,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J-12의 경쾌하고 민첩한 기동과 성능에 크게 만족하였다. 하지만, 순환 배치의 용이함을 위해 기체의 크기가 제한하다 보니 연료탑재량이 적어 체공 시간이 40~45분이 한계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등장한 면적 법칙(Area rule)을 적용하려고 했으나 문화 대혁명에 의해 서방의 기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주날개는 랜딩기어 수납부와 작동부를 제외하면 연료를 빈틈없이 채울 수 있도록 속이 비어있는 허니콤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중량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에서 주문한 탄소섬유를 사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리고 동체 프레임의 격벽들은 티타늄 패널을 깎아 제작하여 J-12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초음속 전투기가 되었다.
그래도 1970년대 중반부터 문화 대혁명의 광풍이 잦아들면서 개발진들은 자신들을 옥죄던 사상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개량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외측의 에어포일을 바꾸었고 기수에는 MiG-21과 비슷한 노즈콘을 추가해 비행 속도에 맞춰 공기 유입량을 조절해주어 결과적으로 엔진의 효율을 높여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400 갤런의 보조연료탱크를 추가하여 항속거리는 기존 688 km에서 1,385 km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체의 크기가 작았던 탓에 체공 시간을 쉽사리 늘어나지 않았고 결국 비슷한 시기 Nanchang이 J-7의 대량생산을 맡게 되면서 J-12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그렇게 J-12는 5대의 시제기만을 남긴 채 개발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F-5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식의 체급이 작은 경전투기는 그 임무가 크게 제약되어 오래 운용하기엔 적합하지 않기에 J-12 또한 개발되었다 해도 주력 전투기가 되긴 어려워 시대가 지남에 따라 빠르게 도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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